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국민파에 대한 지원 ==== * 국민파에 대한 지원병 수 * [[스페인령 모로코]]: 75,000명[* 스페인 현지에서는 '''레굴라레'''(Regulares) 라고 불렀다. 정확하게는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군인 아프리카군 산하의 [[식민지인 부대]]인 '''현지인 정규군(Fuerzas Regulares Indígenas)'''의 약칭이다.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 점령한 상태였는데, 즉 '레굴라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지원병들처럼 스스로의 명확한 정치적 의사에 의해 참가한 [[민병대|의용군]]이 아니라 원래 스페인 식민당국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모로코 현지에서 모집한 [[모로코인]] 부대다. 스페인 정부는 내전 이전에도 의도적으로 이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발생한 시위나 무장 봉기 진압 임무에 투입하고는 했는데 이들은 평소 식민지 종주국인 스페인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아 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한없이 잔인해졌다고 한다. 프랑코 휘하에서 공화정부와 싸우기 위해 투입된 내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민파가 얼마나 많은 모로코인 용병을 고용했는지 당시 스페인령 모로코에 거주하던 모로코인 성인 남성 7명 중 1명은 스페인으로 건너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추가로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 자유 프랑스군 장교들이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병사들에게 현지인에 대한 강간과 약탈을 일정 기간 동안 허락한 것과 유사하게 이들 역시 전투 후 포상으로 스페인 민가를 약탈하고 여성들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가를 종종 받기도 했다. 스페인은 중세시대에 수백년 동안 무슬림 왕조들의 식민지배를 받아 무슬림에 대한 감정이 특히 좋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전후에도 오랫동안 스페인인들의 뇌리에 특히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것과는 별개로 전투력은 스페인인들로만 구성된 부대 이상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국민파 진영의 정예병으로 간주되었다. 현지 종교 지도자들은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참전하는 게 [[무신론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하는 [[지하드]]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금전적인 보상에 혹하지 않더라도 참전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보병과 기병부대로 편성되었다.] * [[이탈리아 왕국]]: 50,000명 [*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최대 75,000명까지 늘어났다. 4개 보병사단과 758대의 각종 항공기, 그리고 그 운영요원으로 구성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상군은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의 상징인 M33 철모보다는 아드리안 철모를 쓰고 전투에 투입된 경우가 상당했다.] * [[포르투갈 제2공화국]]: 20,000명 * [[나치 독일]]: 16,000명 [* 항공기 128대와 운영요원,각종 포병부대, [[1호 전차]]를 장비한 전차부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 [[아일랜드 자유국]]: 600명 *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500명 * [[영국]]: 4,000명 * [[라틴 아메리카|라틴 아메리카인]]: 30,000~40,000명 [*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리코]], [[브라질]], [[니카라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에콰도르]],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국적자들.] * [[유고슬라비아 왕국]]: 1052명 [* 48%는 크로아티아인, 23%는 슬로베니아인, 18%는 세르비아인, 2.3%는 몬테네그로인, 1.5%는 마케도니아인.] 이 외에도 [[필리핀]], [[헝가리]]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호주]] 국적자들이 국민파 진영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터키]] 국적자들이나 나라 없는 난민 신세였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국민파 가담도 확인된다. [[루마니아]]의 [[철위대]]도 군단을 보내어 국민파를 지원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파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탈리아군|이탈리아 왕국군]]의 경우 이탈리아 지원병 군단[* Corpo Truppe Volontarie, CTV.]이라는 이름으로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했다. 거기에다가 해군함들까지 적극적으로 투입해 국민파의 해상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단순한 간섭 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장의 일각을 당담해도 될 만큼의 파격적인 투자를 한 셈. 규모만 놓고 보면 또 다른 중요 지원국이었던 나치 독일은 그냥 단순히 발만 걸친 수준이다. 기갑차량 140대와 270문의 야포, 62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군 35,000명과 모로코 레굴라레 15,000명이 45문의 야포와 7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있었고 8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 군대 20,000명과 격돌한 1937년 과달라하라 전역의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전투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건 증명되긴 했다.[* 이탈리아군과 국민파는 공화파 군대에 6,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강요하고 400명을 포로로 잡은 대신 7,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800명을 포로로 잃어야 했다. 공화파는 65문의 야포와 500정의 기관총, 10대의 탱켓을 노획하는 보조 전공도 올렸다.] 대신 이탈리아는 자기네 앞마당인 지중해에서 잠수함으로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격침하거나 아니면 발레아레스 제도를 기지로 삼아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스페인 동쪽 핵심지역을 공중폭격하여 공화파의 물자난을 유발하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사기를 꺾게 하는 점에서 군사적인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 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일본은 국민파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방공협정을 그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중이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심지어 1938년 3월 5일에 순양함 발레아레스 호를 상실[* 이 배가 격침되면서 국민파 측은 해군력의 1/3을 잃었고, 프랑스가 해상으로 공화파에 무기를 보낼 수 있는 구멍이 뚫렸다.]한 국민파 측에서 해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에서 군함을 사고 싶다[* 당시 시점에 국민파를 지원하던 독일-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의 감시와 견제를 받아 스페인 영해 밖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배를 사려고 해도 독일은 해군 재건을 막 시작한 시점이었고 이탈리아 역시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느라 군함을 한 척이라도 늘려야 했기 때문에 배를 팔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배를 팔아줄 여유가 있는 국가로는 일본이 유일했다.]고 요청했을 때도 "새로 배를 건조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지만 현재 보유한 현역 함선[* 당시 국민파 측이 넘겨달라고 제안한 배는 확실한 구형함인 [[미네카제급 구축함]] 아키카제, [[카미카제급 구축함(1922)]] 카미카제였다.]을 양도하기는 어렵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팔지 않았다. 러일전쟁 시기에도 이미 구식이었던 31년식 속사포[* 주퇴복좌기조차 없는 물건이다.]긴 하지만 오히려 공화파에 소량의 무기나마 수출하던 입장이었던 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은 확실히 국민파 편이었고 국민파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